Book review
오늘 오랜만에 책이 너무 읽고 싶어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러가지 책만 읽었다. 드라마 보는거나 만화책 보는 것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는 나이긴 하지만 책은 역시 또 책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 우선 아직 다 안 읽었지만 앞의 챕터 하나 정도 읽은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 상고사.”
어렸을 때부터 국사나 세계사 등 역사 관련 책이나 소설, 드라마, 영화는 정말 열심히 보는데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 상고사”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초등학교 때 보았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가 어떤 정치적 소견 내에서 씌여졌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알게 되었고 역사라는게 어떤 식으로 판단하여야 하는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왜 기자조선이 거론이 되는지, 고려의 역사가 그닥 제대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지, 고구려의 위대한 전투인 안시성 싸움이 왜 비중이 약하게 다루어 지고 있는지, 발해의 역사 사료가 왜 남아있지 않은지,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때 어떤 식으로 반박해야 하는지 여러가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예전에 고등학생 때, 외국어 과목 외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이 국사였다. 정말 훌륭한 국사 선생님이 있었는데 국사 책 내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의 세부 사건까지, 그리고 역사적 배경까지 모두다 풀어서 설명해준 선생님이셨다. 다들 그 시간에 졸려하고 많은 학생들이 자곤 했지만 나만은 모든 내용을 다 깨알같이 교과서에 필기하면서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들었었다.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있노라면 그 시대에 내가 지금 다녀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방송했던 사극들은 아빠 때문에 내가 거의 다 보았었는데 그 사극 중에는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 많이 달랐던 것도 있었고 정반대였던 내용도 있었다. 또 몰랐던 내용들도 있었다. 물론 사극이라는게 허구성을 지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반대나 다른 내용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신채호 선생님도 이런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역사를 볼 때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은, 자랑스러워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거짓을 고해서는 안 되고 또한 가짜들 중 가짜와 가짜들 속에서 진짜 역사를 발견해 내는 안목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가 왕조가 바뀔 때마다 뒤엎어지고 끊어지고, 승자만의 역사만 남고 패자의 역사는 묻혀지는 그런 역사가 아니라 모두다 계속해서 이어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 당시 같이 존재 했던 모든 나라들은 서로의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오면서 그리고 중간에 몽고의 통치와 일본의 통치가 있으면서 다른 나라로부터 개입된 시각으로 적혀진 주관적인 역사 기록도 적극적으로 배제할 수 있어야 올바른 역사 시각을 지닐 수 있다고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는 모든 학문의 근간이다. 역사를 모르고서야 어찌 대한민국 국민이라 하겠는가. 내가 비록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시민권자이긴 하지만 나는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나를 Korean이라 말하겠다. 미국의 몇백년의 짧은 역사와 한민족의 몇천년의 역사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또한 요즘 내 또래 친구들을 보면 국사를 제대로 빠삭하게 아는 이가 없는데 그건 아주 부끄러워할 일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역사를 알지 못 하면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물어오면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명박 정권이 교육 과정 개편 중에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추진하던가 그랬는데 국사와 국어는 필수다. 한나라의 얼과 정신이 없는 한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할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일제에 흔들리지 않는 정신으로 굳건하게 한민족의 역사를 재조명하였던 신채호 선생님께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또한 과장도 축소도 모두 다 채찍질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역사 문헌을 정리하고자 노력한 모든 사학자들에게도 고개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린다. 다들 역사를 한번쯤 돌아보고 외국인들이 한국 박물관에서 어떤 것에 대해 물어오더라도 자신있게 답변 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에 대해서만큼은 깊은 경외심을 갖고 대했으면 한다. 이것이 이책이 시사하는 바다. 시간이 나면 삼국지가 아니라 우리 나라 역사서 한권을 사서 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 오랜만에 읽은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던 건 초등학교 때? 아님 중학교 때? 인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직 많이 서투른 나이였었고 어른들과 아이들의 벽이 그리 크다는 것도 많이 깨닫지 못 하는 나이였기 때문에 이책이 지닌 아주 큰 의미는 제대로 깨닫지 못 한 채 그냥 그런 책으로 느껴졌었다. 대학 온 이후에 다시 한번 읽으려고 했었으나 무슨 일 때문엔지 읽다가 말았었다. 아마 다른 바쁜 일로 인해 그냥 읽다가 말아버린 채로 그냥 시간이 흘러버렸다.
오늘 이책을 접할 때는 진심으로 이책을 가슴으로 마주하고 읽게 되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했다. 왜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했을까. 어렸을 때 이 앞머리 부분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이 동화를 읽나? 어른들에게 동화가 필요한가?”
막상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동화에 다시 목 말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른들의 이야기와 글 속에는 맑고 영롱하고 깨끗한 세상이 아닌, 폭력과 상처, 비난, 무질서, 부패가 난무한 세상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 말머리를 접하였을 때는, 아…작가가 어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아이들의 맑고 순수한 시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했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어린왕자와 주인공은 한 사막에서 만난다. 어린왕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주인공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물을 가지고 비행기를 고치며 답변한다. 비행기를 고치느라 바빠죽겠는데 계속해서 말을 거는 어린 왕자에게 어른인 주인공은 그냥 무성의하게 답변을 하고 어린 왕자는 말한다.
“내가 아는 다른 어른들과 똑같은 대답을 하네요.”
어릴 때의 나는 남이 어떤 질문을 물어오면 진심을 가지고 대답을 했다. 진심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남보다는 내가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나와는 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안 해버리거나 다른 이야기로 전환을 하거나 대강 대답을 하거나 하는 식의 방식을 취하였다. 상대방에 대해 무성의해진 것이다. 어릴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진정성이 피상적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필요할 때만 대답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외면해버리는… 이런 변화를 어린 왕자가 지적을 한 것이었다.
어린 왕자에서 묘사 되는 지구는 참으로 무섭도록 쳇바퀴 돌듯이 똑같이 도는 세계이다. 철도를 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도 못 한 채 왔다갔다 하루 속을 살고 있고 그 하루 또한 등대지기의 하루와 같이 이곳의 하루가 저곳의 하루로 전염이 되고 그렇게 지구 한바퀴를 돌면 또 다른 이곳의 하루가 시작될 뿐이다. 사회는 자신과 남을 주인과 신하로 생각하는 인간들과, 자만심이 극에 달하는 인간들과, 소유욕이 강하여 눈에 보이는 헛된 것만 계산하고 집착하는 인간들과, 직접 경험은 안 하면서 들은 이야기들로만 그럴듯하게…가짜를 진짜같이 정리하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고 그렇게 묘사된다. 이곳 삭막한 지구 말이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 삶의 의미가 있다면 바로 관계이다. 여우가 가르쳐준 길들임의 관계. 처음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사물이고 생물이지만 조금씩 일상으로 스며들고 그 사이의 거리가 좁혀드는 의식을 치를 때,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관계가 맺어지고 마음을 주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린 왕자와 여우와의 관계도, 주인공과의 일주일간 사막에서의 만남도, 그리고 어린 왕자의 소행성 별 장미와의 관계도 다 이 관계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처럼 관계를 한번 더 생각해보고 그것으로 인해 다시 삶의 의미를 찾았으면 하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관계에 상처 받은 나 같은 사람이, 다시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도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어서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지언정, 또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떤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또 큰 의미를 담은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두노인,” ”사람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톨스토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들에서 많이 그리는 경향이 있다. 첫번째 단편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서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에게 무엇이 깃들여져 있는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져있지 않은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나머지 소설들에서도 인간의 베품과 자비,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른채 앞으로 살 날만을 걱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는 날 동안 현세에 대한 집착이 강하며 쓸데 없는 걱정도 많이 하고 신에 대한 원망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다 죽고 나면 쓸데 없음을 이야기 한다. 아무 것도 자신에게 남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며 인간 또한 본성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고, 이 마음을 다른 이에게 베풀면 곧 또 다른 이에게 그 베품이 옮겨가리라고 톨스토이는 이야기하고 있다. 또 신약성서에서 이야기하듯이 가장 모자란 이에게 베푼 것 하나가 바로 하느님에게 베푼 것이니, 모든 이에게 평소에 잘 하란 교훈을 주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베풀었을 때, 나는 그만큼 똑같이 남에게 베풀었는지…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나를 아는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는 잘 베풀었는지 반성하여 보았다. 아마도 낯선 이들에게는 냉정하였던 것 같다. 길거리 빈민들을 그냥 지나치고 무관심으로 넘겨버리고 그러하였던 것 같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을텐데… 그리고 혹여 베풀어도 나의 전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주 최소한 만큼만. 그렇게 하였던 것 같다. 이런 나의 모습을 꼬집는 소설이었다, 톨스토이의 단편들은… 부족한 나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사랑의 묘약,” “한시간만 더”
슈니츨러 작가 본인의 삶을 보면 카사노바의 삶을 옮겨놓은 것과 같았다고 말한다. ”사랑의 묘약”이라는 이 소설은 여자를 만나고 만나도 다 자신의 것이 아님에 목말라하고 그래서 그 여자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그러하기에 사랑의 묘약을 여자들에게 사용하는데 처음 사용한 사랑의 묘약은 여자들에게 가장 황홀했던 순간을 고백하게 만든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자들은 주인공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기억들을 고백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다시 다른 묘약을 찾아 길을 떠난다. 두번째 찾은 사랑의 묘약은 바로, 여자들의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현재의 이 남자만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역시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소유할 뿐 미래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너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났을 때 세번째 사랑의 묘약을 사용하게 된다. 이것은 미래에도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그만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묘약의 사용은 그 소녀를 주인공의 손에서 죽게 만든다. 죽음으로써, 더이상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못 하고 오직 그 남자만 영원히 사랑 할 수 있게 됨을 말한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착각을 한다. 과거의 사랑에 관해 질투하고, 현재의 사랑을 의심하며, 미래의 사랑에 대해 맹목적인 사랑을 강요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바뀌는 법. 늘 한결 같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과거의 사랑은 과거일뿐, 현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걸 있는 그대로 믿어주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의심한다. 그리하여 묻고 또 묻고 자멸을 초래한다. 결국 자기만 더 비참해지는 것이다. 또한 사랑이 작을 때도 있고 클 때도 있고 사랑이 변할 수도 있는 물 흐르는 것과 같은데 늘 똑같이 균등하게 한결같음만을 고집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부모형제 관계가 늘 한결같을 수 없듯 오르락 내리락이 있듯 연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오르락 내리락이 있는 것이다. 또한 부모형제 관계는 혈육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평생 지속되지만 연인이나 부부 관계는 혈연적으로는 남남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끝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염두해 두어야 한다.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자연스레 두어라. 그게 슈니츨러가 말하는 바인것 같다.
두번째 작품에서는 인간의 목숨이라는 주제로 바꾸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역시도 주제는 같다. 목숨은 천사와의 거래로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정하여 진 것이므로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노력을 될 수 없는 일이라면 너무 지나친 집착이나 욕심 등이 인간을 결국 자멸시킬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을 슈니츨러는 경고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끝났을 때 그 남은 감정에 집착을 많이 해보았던 나로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그 감정을 버리는 것도 참 힘들다고 감히 변명하고 싶다.
- 김영랑 시집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배운 한국 근대시. 그게 바로 “돌답에 속삭이는 햇발”이었다. 가사가 참 보드랍고 아름답고 영롱하다. 그렇게 배웠던 것 같고 내 인상도 그때는 그러하였다. 역사적 배경도 그냥 머리 속으로만 외웠을 뿐 가슴으로 시를 읽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의 다른 시들을 읽으니 나라 잃은 슬픔과 애잔함이 참으로 많이 묻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읽으니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 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라고 적은 조국 해방의 강한 염원이 참으로 눈물 나게 슬프다. ”독을 차고”란 시에서 말하길,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라 한 외로운 독립운동의 그 의지. 붓을 두번이나 꺾으면서 저항하신 그 문단과 조국애에 관해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고 이 후손은 말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용철 시집
예전에 수능 언어영역을 위해 현대 시를 공부하던 중에 우아- 하며 감탄했던 시가 있었는데 바로 박용철 시인의 “바다와 나비”라는 시이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완벽한 호흡과 이미지. 그리고 감성의 표현이 너무나도 그림 같아서랄까. 그의 다른 시들도 읽어보았다. ”십오야”나 “굴뚝” 그리고 “병든 풍경” 등은 시가 아니라 마치 한편의 수채화 같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이미지가 슬픈 그 당시의 현실을 평화로운 자연과 대조하여 보여주는 듯 하다. 또한 ”데모크라시에게 바치는 노래”나 “곡 백범 선생” 등의 시에서는 민족 의식을 강하게 보여주어 한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지금 존재하는 건, 이런 수많은 문호 등 애국자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에게 우리는 깊이 감사하고 존경의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