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 볼 순 없는건가?”
-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두개의 이윤기 감독의 작품을 보았다. “멋진 하루”와 오늘 본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어느밤에 숙제를 하면서 본 “멋진 하루”는 잔잔함에도 불구하고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동시에 ‘내가 어렸더라면 아마 공감하지 못 해서 굉장히 지루했을 법한 영화’ 이기도 했다. 헤어진 이후에 다시 만난 옛 애인. 그런데 그 헤어진 이유가 싫어서라기 보단 더 조건이 좋은 남자랑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그 남자가 그 좋던 직장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결혼하지도 못 했다. 그 뒤로 결혼을 핑계로 그만 두었던 직장도 없이 홀로 사는게 어려워 옛 애인이 갚지 않았던 자신의 돈을 다시 받기 위해, 경마장으로 옛애인을 찾아가고, “하루동안” 그 옛애인과 이곳저곳을 돌며 그 돈의 액수를 채우기 시작한다.
헤어진 옛애인을 돈을 받기 위해 찾아간다라는 표면적 이유. 밖에서 보기엔 참 황당해 보일지도 모른다. 나도 예전에 애인에게 돈을 못 받고 헤어진 것이 있는데 찾아갈까.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돈 보다도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한마디 진심어린 위로의 말과 따뜻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때는 가장 많이 기댔지만 이제는 기댈 수 없는, 그래도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보다도 어찌보면 더 가까운 것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돈을 받으러 다니는 내내 그녀는 남자에게 계속 짜증을 낸다. 그리고 때로는 질투도 한다. 하지만 돈보다도 그녀에게는 보고 싶은, 그리고 짜증을 받아줄 수 있는 그가 있었기 때문에 “멋진 하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저그런 친구 사이에는 짜증을 절대 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잘 지내야 하니까. 여자로서 친한 친구들 사이에도 짜증은 내지 않는다. 여자들은 살짝만 삐지고 토라져도 우정에 금이 갈 수 있는 섬세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지만 남자친구에겐 다르다. 엄마에게 하듯 편하게 짜증을 낸다. 마음의 마지막 벽마저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바로 여자에겐 남자친구이다. 그래서 현재 바닥을 치고 있는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기대어 짜증을 부리고 하루를 같이 멋지게 보낼 수 있는 최후의 사람은 옛 애인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어렵지도 않은 단순한 이야기를 여러사람들을 만나는 짧은 에피소드 여러개로 묶어나가며 큰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멋진 하루”라는 영화의 매력이었다. 그래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새로운 영화 또한 기대되었다. 이번엔 또 어떤 잔잔한 이야기를 인상깊게 풀어나갈까 해서.
이 영화는 다른 두시간이 넘는 영화에 비해서는 대사가 매우 적다. 인물의 단독컷도 많고 표정, 몸짓, 그리고 분위기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영화다. 촬영 장소도 딱 두군데. 자동차 안과 집. 집은 2층, 1층, 그리고 지하실. 이렇게 총 네군데에서만 촬영했다. 스토리도 한줄 요약 가능하다. 바람난 아내의 짐을 싸주는 한 남자, 그리고 그 아내의 마지막 하루. 그런데 원작의 몇장도 안 되는 단편을 이 감독은 두시간 넘게로 길게 풀어냈다. 이 영화의 숨은 매력이 뭘까?
영화의 제목과 관련 지어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마지막 하루를 보내는 이 커플은 계속해서 머리 속으로 생각한다. 이 사람을 사랑하느냐, 하지 않는냐. 그래서 잡고 싶어하기도 하고, 그냥 깨끗이 보내주려고도 하고. 그런데 그런 행동이나 말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마음은 오직 흔들리는 눈빛에서만 나타난다. 처음엔 화를 내지 않는 이 남자가 의아했다. 왜 화를 내지 않을까… 그런데 이 남자가 말한다. 이미 돌아선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는 그녀에게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괜찮아.”
나도 입버릇처럼 말했던 경험이 있다. ”괜찮아.” 그런데 마음은 괜찮지가 않다. 힘들고 아프도록 괜찮지가 않은데 그 사람한텐 괜찮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눈물은 나는데 괜찮다고 말한다. 뛰어가서 붙잡고 싶은데 괜찮다고도 말했었다. 사실 속마음은 이랬다.
‘하나도 괜찮지 않아. 나는 정말이지 괜찮지 않아. 화가 나. 아주 많이. 돌아버릴 것 같애. 미칠 것 같아.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돌아와서 나를 돌아봐줘. 가지 말아줘. 나 지금 힘들어. 나를 사랑해줘.”
늘 마음은 이랬다. 하지만 늘 말하지 못 했다. 그 남자도 그랬던 것 아닐까. 쿨하게 보내주려고가 아니라 힘들어서 무너져가는 자기 자신을 다져 잡기 위해서 최면을 건거다. 자기 최면을. 무너지고 쓰러지려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다져잡은거다.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레스토랑을 예약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마지막을 행복하게 함께 하고 싶어서 레스토랑을 예약했을 것이다. 비와서 다리가 무너져서 서울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살짝 반가워하며 커진 눈망울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의 그 남자에게. 그걸 듣는 남편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따위는 안중에 없고 오직 전화에만 온 신경이 가 있다. 그리고 잠시 반가웠던 그 마음은 롤러코스터 밑으로 한없이 떨어지듯이 다 쏟아내진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양파를 썰다가 매워서 나는 눈물은 내 마음의 솔직한 눈물과 섞여서 비처럼 같이 흘러내려간다. 마음이 아파서 어지럽지만 진정하려고 하는 그에게 양파 향은 계속 눈 속에 매운 향을 가득히 피워댄다. 파스타를 접시에 담아대며, 낯선 집에 어려워하며 조용히 앤초비를 먹는 새끼고양이에게 아내는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질거야.”
그런데 갑자기 영화가 끝나버렸다. 둘이 다시 서로의 흔들리는 맘을 알게되고 다시 잘 되진 않을까? 그런 결말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잠깐 당황해버렸다. 엇! 벌써 끝이야? 하고. 그런데 잠시 문득 생각해보니 아. 그렇구나 싶다. 다시 잘 되는건 영화지, 현실은 늘 이렇지. 맞아. 현실은 늘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 하고 그대로 사랑이 끝나버리는 쪽을 택하지. 맞아….. 그런 생각을 해보니 아, 이게 이윤기 감독의 매력인가 싶다. ”멋진 하루” 영화의 결말 부분도 그러했다. 하정우를 전철역에 내려준 전도연은, 전철을 탄 하정우를 앞질러 그가 도착할 역에 미리 가 있다. 그리고 차 안에서 백미러로 그가 걸어가는 길을 지켜본다. 그리고 허-참. 훗하며 ‘내가 뭐하는거지.’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떠난다. 그때도 역시 마찬가지의 느낌으로 보았었다. 해피엔딩이 아닐까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헤어진 애인 다시 붙잡아봐야 뭐하나. 헤어진 애인은 헤어진 사이인데. 그리고 우린 다시 제대로 되지 않는데. 한번 헤어지면 또 헤어질텐데. 살짝 흔들리는 마음으로 그리움으로 한번 쳐다보고 훗하고 다시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모두 한번쯤 경험해 봤음직한 그런 일들 아닐까?
요즘 트렌디한 로맨틱 코메디의 흐름; 남주나 여주 중 한쪽이 상류층이나 잘 나가는 재벌, 나머지 한쪽은 서민이나 비주류, 이런 경우에 둘이 잘 되는 것으로 끝나는 동화 속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현실의 그 느낌 그대로여서 이 감독의 영화는 나로서는 크게 매력이 있다. 물론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현실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0.00000…..1%니까 모든 여성들의 로망이고, 그런 로망이 있기 때문에 열혈 애청자들이 생기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오히려 현실의 99.9999999….9% 아프고 실현당하고 괴로워하고 그리워하고 헤어지고 그런 이야기들이 더 공감이 된다는 말이다.
현실의 멀지 않는, 가까운 이야기를 어떻게 짧은 시간 60분 내에 풀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첫 5분 내에 인물의 배경과 성격을 풀어내고 동시에 그들간의 갈등을 바로 등장 시키며 나머지 55분 동안에 제 2,3의 갈등을 엮어내고 풀어낼 수 있을까. 아님 풀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져버릴까. 이것저것 생각이 많이 드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며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우선 배우들의 동작과 표정이다. 특히나 흔들리는 눈빛, 그리고 손가락 움직임, 한숨, 침 삼킬 때 목젖 하나하나까지 잡아낸 그 시선이 매우 칭찬해줄 부분이다. 또한 중간 중간 삽입된 비오는 장면들이 매우 훌륭하게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촬영 상에서 좋았던 부분은, 임수정이 베란다를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부분이다. 안팎으로 왔다갔다 거리는 부분을 사이로 화면을 잘 분할하였고, 유리를 통해 투영되 두가지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 매우 좋았다. 사실, 유리를 통해 두가지의 다른 모습을 가장 잘 담아냈던 작품은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인데, 그 영화에서는 각자 다른 두 사람의 교감을 유리를 통해 잘 드러냈고, 또 유리 자체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벽으로서의 역할을 잘 했다면, 이 영화에서 베란다 유리는 흔들리는 두가지 마음,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의 들락날락 거리는 마음의 벽, 실제로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두가지 마음의 벽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배우의 연기로서 좋았던 장면은, 베란다 유리 앞에 서있는 현빈이 뒤에 있는 임수정을 뒤로 힐끗 보았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눈을 돌리는 장면이다. 대사도 없었고 크게 임팩트가 있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재미가 있었던 부분은, 임수정의 그 남자에게 전화오는 부분이었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분명 내가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던 배우인데….누구지? 누구지? 하다가 알아버렸다. 이 감독의 전작, “멋진 하루”에서 나왔던 배우 하정우씨의 목소리다. 또 그 장면에서 고양이 주인으로는 “여자, 정혜”에서 나왔던 김지수씨가 까메오로 나왔다. 재미있는 부분이다.
영화를 보며 아쉬웠던 점은, 물건 하나하나를 챙길 때마다 어떤 추억이 어린 듯 한데, 가끔은 어떤 추억이 어렸는지 비추어 주었다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스타 책에 관한 에피소드는 배우들의 말로써 풀어냈었지만, 분홍 셔츠나 아끼던 찻잔, 가방의 경우는 무언가 더 사연이 있을텐데 그냥 관객들은 모른채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가끔 어떤 옷들을 보면서 옛추억에 잠시 그리워할 때가 있는데 그런 옛추억까지 조금더 풀어 내 주었더라면 관객들도 더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임수정의 “괜찮아”라는 대사로 그냥 끝을 내버렸는데, 그 대사 후에 살짝 맑아오는 하늘 또는 빗방울이 이제 점점 얇아져서 풀잎사귀에서 바닥으로 살짝 미끄러져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정도로 마무리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비온 뒤에는 다시 맑은 날이 오니까. 그게 더 “괜찮아”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건 아주 미세한거지만 현빈의 파스타 만드는 씬에서는 파스타 면을 삶는데 소금을 엄청 많이 두 숟가락씩이나 넣었는데, 그리고 올리브유를 완전 들이 붓던데 그렇게 했다간 완전 느끼하고 짜다. 소금은 아주 적게, 그리고 올리브유도 티스푼으로 한스푼 정도면 되는데 너무 많이 넣는 것 같아서, 심각한 영화에 피식하고 웃게 되었다. 또한 마늘도 너무 굵게 썰고 후라이팬으로 올리브유에 볶는 장면에서 너무 후라이팬을 뒤짚어대서 계속 웃었다. 심각하고 진지한 영화라면 그 정도까지 체크해주는 섬세함까지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